봄이 오면 꽃이 피고


2020년 9월 발매, 올가미 개발

PC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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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클리어한 게임 2023년에 감상 쓰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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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주의 ▼

 

 

 

 

 

 

 

 

오토메 게임 시나리오라이터들이 제일 고민하는 부분은 공략 캐릭터보다도 주인공의 자아(에고)를 얼마만큼 드러내야 하는지가 아닐까? 오토메 게임은-특히 텍스트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이입형 플레이어와 비이입형 플레이어의 취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덕목이 요구된다.

(새봄 얼굴 온오프와 이름 설정 시스템은 제작진이 시스템으로 드러낸 '덕목' 중 하나일 것이다)

 

이입형은 이입만 할 수 있도록, 비이입형은 비이입만 할 수 있도록 선택지들 중에서 골라먹기하면 되지 않냐고 하기엔, 오토메 게임은 여전히 한줌시장이다. 그래서 한 명의 플레이어라도 사로잡을 수 있도록 해야한다. 난 2020년 당시에만 해도 서로 알아서 갈 길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즈음 모 일본 여성향 모바일 게임 회사가 '유메죠시' 뜻도 제대로 모르고 쓰는 걸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서로 갈 길을 못 찾아가는 상황에서 두 유저층을 만족시키는게 첫 번째 니즈로 형성이 되어있는 시장이다보니 상반되는 두 유저는 언제나 알력을 빚는다. 게임은 체험의 한 종류이기 때문에 누가 맞다할수는 없는 것. 아무튼 오토메 게임의 주인공의 성장과정이나 본인의 호불호가 뚜렷할수록 이입형 게이머들은 거리감, 혹은 불쾌감을 느낄 때가 많다고 한다. 

 

그럼 이 게임의 주인공 '새봄'은 어떨까. 나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두 유저층 모두 배려를 하려다가 생긴 결과인지, 제작진의 고민이 잘 드러나면서도 "이도 저도 아닌" 느낌을 받았다.

 

먼저, 성장 시스템. 봄꽃 내에서는 수련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시스템은 가시적으로만 구현해놓은 시스템으로, 배드엔딩으로 들어갈지 아닐지에 대한 분기 요소만 되어줄 뿐 스토리에 큰 영향은 없다. 새봄이 활을 미친듯이 잘 쏘기 위해 수련을 죽어라 해도 텍스트엔 영향이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 시스템을 공략 캐릭터 수만큼 반복해야 해서 중후반 즈음 되면 정말 하기 싫어진다. 그런데 이 노가다를 한 후의 보상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이렇듯 시스템에서 새봄의 '성장'을 그리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면 텍스트 어드벤처니 텍스트로 승부보면 된다. 근데 그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나한테 새봄은 주인공으로서의 자아가 있다 만 것에 가까웠다. '집으로 돌아간다', '원화가 된다' 목표설정이 있으면 그걸 끝까지 관철해내야하는데 후반으로 갈수록 그 목표는 흐지부지되고, 새봄의 촘촘한 감정선은 없다시피하며 내 기억으론 마지막에 선택지로만 집에 간다, 안 간다 선택하고 끝났다.

 

주인공 새봄은 배려있고 남을 이해하는 성격말고는(대부분의 오토메 게임 주인공이 하나같이 다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결과적으로 개성이 흐릿하다. '현실로 돌아간다'라는 목표를 세워놓고 화랑들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개선하려는 점에서 위화감을 느낀 것도 그래서다. 어차피 헤어질 인물들이라 처음엔 신라에서의 인간관계에 회의적인게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건이 있어서 관계에 적극적이 됐다거나. 근데 그런 장면은 없다. 새봄이 현실세계에 돌아가려고 집착하는 감정선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마지막에 주인공이 '현실로 돌아간다'를 선택해서 공략 캐릭터와 헤어지게 돼도 전혀 비극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주인공 캐릭터가 이렇다보니,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것도 주인공이 아닌 조연 캐릭터가 맡는다. 신분제를 비판하기엔 신라 시대 사람 그 자체가 아니어서 어정쩡하고, 여성 차별을 비판하기엔 새봄이 원화 후보로서 지내며 원화가 되는 엔딩이 있어서 새봄 말고 다른 캐릭터한테 맡겨버린 느낌이다. 

 

봄꽃이 가진 장점은 시류를 읽고 현재를 반영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 작품이 말하고 싶었던 건 내 생각엔 결국 교차 페미니즘같다는 점에서. 추리물적인 요소도 괜찮았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인과가 있었고 연관관계를 새봄 측에서 똑똑하게 짚어주는 것도 좋았다.

 

다만, 그 교차 페미니즘을 나타내는 방식이 <역사의 타자화>인 부분이 많았다. 이것도 주인공에서 오는 문제인데, 주인공이 사실 현대에서 온 인물이기 때문에, 또한 조연 캐릭터로 주제의식을 드러냈던 부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신라와 신라의 인물들은 타자화된다. "결국 현대인의 입장에서 신라는 한계가 있었다", "안 그래 보였어도 그런 시대였다"... 모두 타자화다. 

 

나는 차라리 신라 시대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골품제를 더 파고들어서 신분 차별 문제에 (지금보다) 더 집중하길 바랐다. 신분 차별을 다루는 이야기도 시류를 반영한 이야기일 수 있다. 우리나라에 계급은 투명하게 그리고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새봄은 화랑들을 밑에둔 원화 후보이며, 원화돼서 승승장구하는 엔딩도 있고, 진흥왕도 밀어준다. 주인공이 그나마 메인 스토리에서 짚고 넘어갔던 건 신분 차별이다. 근데 다른 캐릭터의 입을 빌려 '반전 요소'로 여성 차별을 말한다. 이러니 주인공의 성장과정과 주제의식이 결과적으로 합치가 안 된다. "아니 새봄이는 그래도 원화 후보로서 게임 끝까지 그 역할을 열심히 수행했는데요. 갑자기 그러시면..." 이라는 느낌. 게임은 체험의 일종이다, 그 체험(봄꽃이라면, 수련 노가다)을 뒤집어 버리는 건 많은 빌드업이 필요하다. 여성이 실제로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었고 정치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역피셜같은 건 무시해도 말이다.

 

주제의식에 대해서 느낀 점은 이정도고, 비주얼 노벨로서의 완성도 부분만 짚고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 게임은 비주얼 노벨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인 "멀티 분기" 시스템을 너무나도 못 살려서 아쉬웠던 게임이다. 공통루트에서 수련하면서 공략 캐릭터와 썸타는 부분까진 정말 괜찮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다. 어떤 캐릭터를 선택하든 서브 캐릭터가 주제의식을 말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큰 줄기는 똑같다. 보통 공통루트를 어떻게 진행했냐에 따라 큰 틀이 달라지지 않고 그대로인 게임이라면, 주인공 포함 메인 캐릭터들이 활약하는 "올캐릭터" 내용이다. 근데 공략캐는 개별 루트에서 잠깐 비는 타이밍에 등장해서 갑자기 새봄과 '세기의 사랑'만을 하는 걸로 끝난다. 이걸 일각에서는 "여캐말고 남캐 비중 높여라"로 일차원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던데... 전혀 아니다... 이러니 썸 타는 관계에서 세기의 사랑으로 흘러가는 과정이 납득이 안 돼서 문제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장점도 있었지만, 내 취향과 사상에 따라 단점이 더 부각되어 다가왔던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 동인팀의 첫 작품이다. 첫 작품부터 이렇게 많은 얘기를 할 수 있게 하는 작품은 또 찾아보면 잘 없다. 이 팀이 부디 다음에 만드는 게임이 있었으면 좋겠고, 적어도 앞으로 더 발전할 것이라는 확신은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