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작년에 플레이하다가 중단하고 이제서야 컴플리트. 이미 많은 사람들이 비판을 했기 때문에... 그냥 플레이하면서 들었던 의문이나 아쉬웠던 부분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 여주인공 비올렛. 자애의 여신 미레느의 그릇으로써 유벨에게 키워진 캐릭터입니다. 미레느가 그릇을 만들 때 파괴의 신 제로를 사랑했던 마음을 버리면서 만들었기 때문에 비올렛은 그 누구보다 사랑을 갈구하고 사랑 때문에 세상을 파멸로 이끌기도 합니다. 이런 건 다 제쳐두고, 비올렛은 미레느를 담기 위한 그릇으로 만들어졌다고는 해도 단순 꼭두각시 인형은 아닙니다. 유벨이 나름대로 정을 담아 취향의 여인(?)으로 키웠기 때문이죠. 레느의 책무에 대해서 이론적으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 비올렛입니다. 타네비토를 이해하기 위해 유벨이 비올렛에게 자는 것, 먹는 것 등을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하나비토는 피로가 쌓이지 않고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데도 말이죠.
머리로는 레느로서의 책무, 세상을 지킬 유일한 신의 대의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지만 그 사랑 때문에 흔들리고 번롱당하는 게 비올렛의 역할인데... 아무래도 그 레느로서의 책무를 글로만 배웠다는 느낌이라 책무를 버리고 사랑을 선택하는 비올렛에게 어떠한 안쓰러움도 느끼지 못했네요. 작중에선 사랑 타령만 하는 아이는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흔들려 놓고도 솔비에르를 생각한다든지 책무를 생각한다든지 합니다. 그런 비올렛이 타락하여 사랑만을 외치게 되는 거죠. 이게 결코 나쁘다는 건 아닌데, 앞서 말했듯 과정이 얇고 무게감도 부족해서 결국 비올렛을 제3자 입장에서 이해하지 못해 미쳤냐며 욕하게 되는 상황까지 온 게 아닐까 싶습니다.
비올렛은 두 가지 설정을 가지고 있죠. "레느로서의 책무를 인지"하고 있고 이 모습으로 기사들을 감화시킨다는 점, "온실 속의 화초"로 길러졌다는 점. 이 두 설정은 서로 참 안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기사들을 충성하게 만들려면 주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하는데 정작 유벨의 품에서 화초처럼 길러진 것... 둘 중 하나만 하지 참 이상해요. 책무를 완벽하게 이해시킬려면 레느는 지상의 세계를 어느정도는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설정 붕괴가 되겠지만 아예 그쪽 세계에서 살아보든가요. 그래야 자기가 무슨 세계를 구하는지는 알죠. 근데 현실은 위에(오르페의 나라)가 대통령제인 것도 오르페가 와서 직접 말해야 알았을 정도였습니다. 지상의 세계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거죠.세계가 레느의 손에 달려있는데 정작 그 세계를 손에 쥔 레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말이 될까요? 그리고 이런 레느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기사들...도 이해가 될까요? 공통 루트부터 이야기의 설득력이 부족해집니다. 그리고 이런 레느가 사랑에 미쳐 세계보다 사랑을 선택하는 과정도 동전 앞뒤 바뀌듯 이루어집니다. 방금 전에는 레느로서의 책무를 운운했던 아이가, 지금은 세계 그딴 거 다 던져버리고 사랑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비올렛을 욕하기는 싫고, 그냥 이렇게 쓴 시나리오라이터를 욕하고 싶네요.
* 캐릭터들의 설정이 해당 캐릭터의 루트에서만 쓰이고 버려집니다. 이 작품이 개개인의 이야기만을 다뤘다면 괜찮았겠지만, 한 명이 없으면 그라스를 착취하는 게 힘들고 또 레느와 기사들과의 유대감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다뤄지는 작품에서 어떤 설정이 어느 루트에서는 안 나오고, 어느 루트에서는 나온다면 그건 납득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기스란. 기스란이 부족한 그라스 때문에 미친다는 설정은 레온과 기스란 루트에서만 쓰이고 버려집니다. 다른 루트에서 크리잔템의 그라스가 항시 가득차있는 것도 아닌데, 많은 하나비토를 학살했음에도 유벨의 그라스까지 필요할 정도로 그라스 부족에 시달렸던 기스란이 다른 루트에서는 비교적 멀쩡하게 나오죠.
그리고 루이. 루이는 거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 수준입니다. 본인 루트에서 아주 쉽게 다른 루트의 중심이 됐던 갈등들을 해결해버립니다. 그런 루이가 다른 루트에서는 전혀 활약하는 모습이 안 나오죠. 사실 그 해결 방법도 매우 단순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자애의 여신 미레느에게 네가 하는 건 자애가 아니지 않느냐? 라고 말하는 것 뿐이었죠. 다른 루트에서 루이가 비올렛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도 아니고, 여전히 충성을 맹세한 채인데 힌트조차 알려주지 않죠. 본인 루트에서만 그렇게 쉽게 해결됐던 이유가 뭘까요... 레느가 루이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랬다고 하면 진짜 때린다.
루이 루트에서는 또 다른 의문점이 있는데 서로가 접촉하면서 느끼는 온도에 대한 거네요. 사랑을 다루는 작품이라면 나름 중요한 소재고 이런 관계(신과 신이 아닌 존재의 접촉)가 다른 루트에서 나오지 않은 것도 아닌데 왜 루이 루트에서만 쓰이고 버려지는지...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했던 여신 미레느. 제일 이해 안 가는 캐릭터입니다. 레온과 기스란 루트에선 그렇게 잔인했던 미레느가 다른 루트에서는 고민하고, 좌절하고, 쉽게 물러나고, 같은 신을 보며 반가워해서 선처해주고....네...그냥 엿이나 먹어라... 이렇게 쓴 이유도 신이니까 변덕스러워서~하면 정말 때린다..(2)
* 세계관이 이상합니다. 그라스가 없으면 자연재해가 일어나기 때문에 인간들이 노력해서 해결될 부분이 아니라고 해놓고... 오르페 루트에서 인간에게 그럴 힘 정도는 있지 않느냐라는 의문을 던집니다. 그래서 오르페, 유벨 루트에선 파르테덤과 지상을 분리시키기도 하는데...아니 하는 건 좋은데, 그래서 지상은 어떻게 되는데? 오르페는 신이니까 그렇다 치는데 유벨 루트는?
네.... 아무도 안 알려줌....... 그리고 오르페 루트도 웃긴게, 인간이 그정도 힘은 있다면서 결국 오르페라는 새로운 신에게 의지하죠. 이 작품 인간을 도대체 뭘로 보는 거야? 이거 플레이 하는 사람은 인간 아닌가요?
* 아무튼 마음에 안 드는 점은 더 있는데, 그래도 8천엔 주고 산 게임인데 계속 불만만 가진 채로 하는 건 제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루이 루트 즈음부터는 포기하고 했더니 긍정할만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루이 루트는 다른 루트에서 계속 괴롭혔던 미레느 문제를 너무 일찍 끝내버려 둘의 연애의 밀고 당기기를 좀 더 볼 수 있었다는 점이 개인적으론 즐거웠고, 유벨 루트는 뭐 기대했었던 비올렛이 유벨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전개는 안 나오긴 했는데 그와는 좀 다른 방식으로 마음에 들었어요. 키잡했던 이야기를 역키잡으로 바꾸는 이야기... 이거 취향 엄청 탈 거 같은데, 의외로; 정말 의외로;;;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복종 루트는 좀 취향에서 벗어났는데, 아예 미쳐버린 만큼 비올렛 자체를 여신처럼 섬겨주는 게 어땠을까 싶기도...
* 라뷔르는 디렉터가 (연애 아닌) 밀고 당기기를 하는 모습을 시스템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귀찮기만 했습니다. 사실 스킵하는 게 너무 불편해서 평가를 다 깎아먹은 부분도 있는데 그렇다고 밀당하는 부분이 긴장감 있게 느껴진 것도 아니라;
* 우스바씨 그림은 정말 좋았습니다. 그냥 좋다고 말하기엔 부족할 정도로 온갖 미사여구를 다 갖다 붙이고 싶어요. 저한텐 가끔 생각나면 칩 넣고 갤러리 스윽 보는 정도의 게임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