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전설 시작의 궤적

英雄伝説 創の軌跡

 

2020년 8월 27일 발매, 팔콤 개발

플레이스테이션 4

 

* * *

 

모든 내용 포함한 감상. 스포일러 주의 ▼

 

 

 

 

 

 

 

 

 

2020년 8월에 발매한 게임을 실시간으로 플레이하고, 엔딩 본 뒤 감상은 2021년 7월에 쓰는 나...^^ 작년에 엔딩을 봤을 땐 긍정적인 감정보단 부정적인 감정이 더 많이 들었다. 섬궤가 네 작품으로 질질 끌어서 그런지 이번엔 하나의 작품으로 마무리를 해서 전보다 빠른 전개와 깔끔한 끝맺음이 호평을 받았고 나도 그 부분은 좋게 봤지만, 궤적 시리즈의 고질적인 문제점은 그대로였고, 오히려 더 심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이 너무나도 양극화돼서 나타났던 디스크였음. 그래서 섬4 때처럼 두 가지 관점에서 감상을 써보려고 한다.

 

먼저 좋았던 점.

 

0123

로이드 루트.....

제일 호평인 건 C 루트, 그 다음이 린 루트고 로이드 루트가 제일 인기 없는 걸로 알지만 내가 좋아하는 궤적 시리즈의 주제에 제일 어울리는 루트라고 생각해서 좋았음. 도입부에선 <섬의 궤적 4>와 비슷한데다 고질적인 문제인 "아무도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미없는 성선설을 또 주장하면서, 저주와 연장선인 소재를 사용해서 인기 없는 것도 이해하지만 섬4와 해결 방식에서 결정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크로스벨을 바꾸는 건 한 사람 혹은 소수가 아니다"

 

정체불명의 저주에 휩싸이면서 크로스벨 시민들은 온전히 자기 힘으로 해결하기 보다는 특무지원과라는 "영웅"에게 의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벽궤에서 특무지원과가 영웅이라서 사건 해결을 할 수 있었던걸까? 오직 특무지원과만이 크로스벨을 구했던가? 아니면 특무지원과만이 구한 크로스벨은 의미가 있는가? 로이드 루트는 이걸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궤적 시리즈의 장점인 각 서사를 가진 NPC─시민들 또한 힘을 모아서 크로스벨을 구한다는 내용으로 흘러간다. 

 

<섬의 궤적 4>에선 토르즈 사관학교 출신이면서 다양한 입장에 놓였다는 명목으로 학연, 지연, 혈연으로 묶인 신, 구7반, 그 외 학생, 졸업생들이 영웅이 되어 마왕을 쓰러뜨리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시궤의 로이드 루트는 처음부터 시민들에게 유격사협회 표절이라 욕 먹으며 삐걱대며 나아갔던 특무지원과가 주인공으로 나오기에, 이런 전개가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이 과정을 보며 이것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궤적 시리즈의 내러티브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보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걸 다시 보게 되니 감동이었음.

 

또 다른 장점. 시궤가 나왔을 당시 주 제작에 젊은 직원들이 여럿 참여했다는 말이 돌았다. 시궤의 주인공을 누구로 할지 고민 중에 그 젊은 직원이 루퍼스를 C로 해서 등장시키는 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그걸 그대로 채용했다는 것이 그 예다. 그래서 그런가, 시나리오에서 전반적으로 반복되는 대사가 줄었다.

 

"...아...", "린...!" 하면서 "유시스에 뫄뫄에 솨솨까지!" 라며 이름 줄줄 읊기, "하라오쿠쿠루" 같은 전작에서 계속 반복되는 대사들이 아예 안 나오는 건 아니지만 역시 하나의 디스크로 마무리돼서 그런지 눈에 띄게 줄었다. 

 

몽환회랑 야리코미 때문에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아주 길다.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정말 원 없이 써볼 수 있음. 가격 방어 목적 때문이겠지만 발매 뒤 조금 시간이 지나 대형 업데이트를 했었는데 새롭게 추가된 브라이트가 에피소드나 <여의 궤적> 관련 에피소드가 마음에 들었다. 

 

0123

 

그리고 에스텔과 요슈아... <섬의 궤적 4> 때 에스텔 취급이 정말 마음에 안 들었어서, 이번에 더 기대를 했는데 대형 업데이트 전에는 로이드 루트에서 좀 나중에 합류하는 바람에 분량이 없어서 아쉬웠는데 업데이트 후에 추가된 에피소드를 보고 그럭저럭 만족하게 되었다. 저 장면은 에피소드 장면은 아니고 초반 로이드 루트에서 나오는 장면인데 아ㅠㅠㅠㅠㅠ 너무 좋았고 ㅋㅋㅋㅋ 이게 바로 내가 좋아하는 요슈에스 분위기인데 섬4에서의 취급은... 부들부들

 

좋았던 점은 이런 부분이고, 이제 아쉬운 점. 

 

앞서 말했듯, 궤적 시리즈 고질적인 문제점이 더 심화돼서 드러났다. "잘못을 잘못이라 하지 않는 것". 하필 루퍼스가 주인공 세 명 중 한 명이라 그런 걸까? 나는 죄인이 회개하는 내용도 좋아하고, 용서하는 내용도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용서란 끝내 사람이 자신과 마주보고 앞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성숙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용서는 잘못을 한 사람을 사하는 것이다. 잘못을 잘못이라 하지 않는다면 용서라는 행위도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잘못을 저지른 이들을 "잘못"이라 하지 않는다. 한다고 해도, 너무나도 어설프고 어디든 빠져나갈 구석을 만들어 놓는다. 초기 궤적 시리즈부터 잘못을 저지르고 회개하는 인물은 꾸준히 있어왔다. 하궤는 리샤르, 영벽궤는 이안...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잘못을 저지른 규모는 점점 커지는데 이들을 바라보는 주인공, 메인 캐릭터들은 잘못을 잘못이라 하지 않고 이해해주기 급급하다. 남에게 피해를 준 캐릭터는 그렇게 입체성이란 걸 부여받지만, 남을 이해하기 급급한 메인 캐릭터들은 분노, 미움, 울분, 몰이해가 빠져있기에 평면성을 부여받는다. 입체와 평면이라는 양극단 위에서 죄인들의 회개란 그저 캐릭터성만 챙기는 것 뿐, 작품의 주제를 그저 가볍게만 만든다. 누구도 악의적으로 잘못을 하지 않는 세계인데, 앞으로 싸워야할 의미가 있는가?

 

이렇게 느끼게된 장면들 중 몇 개만 가져와본다.

 

크로스벨 "무혈 점령"이라며 루퍼스가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고 말하며 용납은 하지 않지만 원망도 하지 않는다는 아리오스.

(이게 말이야 방구야?)

자신의 엄마가 전쟁에 가담한 일은 납득할 수 없어도 경영자로서 최선의 선택을 했다는 알리사.

(알리사한테 왜때문에 이래요?)

 

지난 대전의 기억이 생생하니까 미래로 이어질 연구를 시작할 때라며 병기를 계속해서 연구하는 과학자 캐릭터들.

(좀 더 숙고할 무언가가 있어야 할텐데, 안 나온다.)

 

많은 희생자가 나온 비극적인 전쟁이었던 백년전쟁을 '추억'하며 하하호호 친목을 다지는 현역 군인들....

 

이들에게 분노란 없다. 한 명쯤 가져도 상관 없을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 그나마 울분 정도의 감정이라고 한다면, 모든 걸 감싸 안고 희생해야했던 노멀 루트 린 정도일까. 이건 내가 말하고 싶은 것과는 결이 다른 서사이니 넘어간다.

 

이렇듯 궤적 시리즈는 작품 안 캐릭터들은 믿어도, 작품 밖 플레이어는 믿지 않는다. 자신들이 만들 캐릭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플레이어한테 맡기지 않고 자기들끼리 정해준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용서하고, 잘못을 감싸기도 해보고, 결과적으로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 거겠지. 오즈본 재상을 끝내 '숭고한 희생'을 한 아버지 캐릭터로 만들었던 것처럼.

 

문제는 그로 인해 피해 받고 상처 입은 캐릭터들도 자기들이 만들었다는 건데, 그들의 감정은 이미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고 감싸주기로 되어있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일률적, 평면적인 서사를 가진 채로 완결난다. 잘못을 한 캐릭터들이 오히려 입체적인 서사를 가진 캐릭터로 완성된다. 이 양극단의 화합은 너무나도 기계적이다.

 

너무 과거작만을 옳은 것처럼 말하는 것도 안 좋은 건 알지만, <하늘의 궤적 FC>의 리샤르 취급 정도는 정말 괜찮았다. 잘못을 잘못이라 확실히 말하고, 군인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 민간 기업으로 빠져서 공익에 힘쓰는 인물이 된 것도 좋고... 따뜻하면서도 차가운, 미지근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섬의 궤적>의 철혈의 아이들의 취급은 시나리오가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같은 플레이어는 아직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는데, 따뜻한 눈으로 그들이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결국 그들이 아무것도 잃은 것 없는데도 지켜봐야 하니까.

 

차라리 여행을 떠나는 루퍼스가 나았을 정도로, 그 포지션 그대로 할 일을 계속 하는 렉터와 클레어는 대체 무엇이었던가...

 

궤적 시리즈의 스케일은 플레이어에게 더 놀랄만한 감정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인지 과거작에 비해 점점 커지고 있지만, 마무리하기까지 매듭을 제대로 못 짓는 것 같아 여전히 아쉬울 뿐이다. <여의 궤적>에서도 이런 팔콤의 스탠스는 여전할 것 같은데 이번엔 주인공이 정의의 편이 아니라 그레이존에 있고 스토리 분기까지 대놓고 들어간다니 어떻게 될까. 이제는 주인공에게 입체성을 부여하기 위해 이러한 방법론을 사용할 것인가? 현재 여궤를 정보 하나하나 챙기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한편으론 걱정이 태산이다. 

 

팔콤 공식 앙케이트에도 이런 의견을 대충 정리해서 보낸 적이 있는데, 과연 앞으로 어떻게 될지... 나는 궤적 시리즈의, 같이 나이를 먹어가는 생생한 세계관이라는 장점을 정말 좋아하기에 끝까지 따라가기로 마음 먹었으므로 여궤도 당연히 해볼 테지만, 이런 서사가 계속 되면 지쳐 떨어져나갈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지만.

 

이렇게 나에겐 장점과 단점이 확실히 있는 <시작의 궤적>이었다. 아무래도 엔딩 봤을 당시엔 부정적인 감정이 더 크게 다가와서 좀 힘들었지만 거의 1년이 지난 지금은 그 감정이 조금은 풍화되어 장점도 많이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1작으로 완결되니까 빨라진 전개와 자극적인 흐름... 요즘 한국에선 웹소설이 인기인데, 시궤도 그 웹소설의 장점을 어느정도는 공유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그저 2개월 뒤 나올 <여의 궤적>이 잘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