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4 / 플레이 타임 36시간 / 레벨 65


네타주의


1. 숙명론에 의지한 대충 쓴 시나리오

이야기의 주인공은 녹티스다. 딱히 이유 같은 건 없이, 어렸을 때 신에게 왕이 될 운명이라고 선택받았다. 그래서 왕으로서 키워졌다. 왕의 옆엔 칸나기라는 왕을 수호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자가 있다. 자발적으로 그 사명을 선택한 게 아닌, 칸나기 또한 신에 의해 선택되었다. 왕의 주변인물은 누구인가? '어렸을 때부터 참모로서 교육받았던' 이그니스가 아무 조건 없이 붙어있다. 마찬가지로 '어렸을 때부터 보디가드 역으로서 교육받았던' 글라디오가 아무 조건 없이 붙어있다. 그리고 마치 운명처럼 칸나기의 강아지를 만나게 되어 녹티스와의 인연이 시작된 프롬프토도 있다. 여기서 거의 이레귤러에 가까운 프롬프토를 제외하고, 녹티스와 함께하는 동료들의 감정이 제대로 나온 적이 있는가? 프로그램이 잘 짜여진 로봇처럼 녹티스를 졸졸 따라다니며, 녹티스를 왕의 길로 이끄는 레드 카펫을 깔아주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교육받았기 때문에"라는 이유는 20년 전이라면 그럭저럭 먹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여기서 탈피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인간은 자신의 길에 확신을 가지지 않는다. 누구나 고민하고, 이 길이 맞는지 틀린지 고뇌하며 때론 절망한다. 아버지 레기스가 죽었는데도 성장을 하지 않는 녹티스를 보면서, 동료들은 충분히 갈등할만 하다. 나는 지금까지 왕을 위해 자랐는데, 교육받았는데, 내가 모시는 왕은 왜 이 모양인가하지만 녹티스를 따라다니는 세 명에겐 그런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천하태평하다고 할까. 글라디오만이 도저히 못 참겠을 타이밍에 이제 자각을 하라고 재촉할 뿐이다.


그래서, 녹티스는 꼭 철이 들어야만 하는가? 녹티스가 왕의 자리를 두고 갈등하는 이유는 충분히 인간적이다. 당장 역사서만 들여다봐도 왕의 자리를 부담스러워 해 도망간 계승자들도 많다. 녹티스는 그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인간적인 이유로 갈등하는 캐릭터를 숙명론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버리면 이야기의 가치는 한없이 추락한다. 아덴에 의해 혼자가 된 녹티스는 왕으로서 루시스 왕국을 되살려야 한다는 이유보다는 지금 여기서 살아남아 탈출해야 한다는 이유로 반지를 낀 것으로 보였다. 마지막에 바하무트가 세계를 되살릴려면 너의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말에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마치 그게 운명인 것처럼. 녹티스의 성장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루나프레나의 역할은 왕을 수호하고 신을 깨워 신이 왕에게 계시를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작중에선 칸나기라는 이름의, 아주 중요한 역할로 나오지만, 그런 역할을 아주 형편없게 소모했다. 여기서 칸나기가 시리즈 전통의 '여자 주인공' 포지션에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작중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 수 없는 아라네아조차도, 잠시나마 동료가 되어 녹티스 일행과 싸우는데 루나와 녹티스는 제대로 재회도 못해보고 이별했다. 아무리 제국과 인섬니아 사이라는 벽이 있어도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이라는 포지션인 이상 그 벽을 허물고 둘의 비련을 직접적으로 표현해 플레이어를 납득시키는 게 스토리텔링이 아닐까? 녹티스가 자신이 왕인 것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였다면, 루나는 자신의 죽음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였다. 도저히 죽을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명이 끝났다고 죽는다. 여기서 납득하고 감동받는 플레이어는 과연 몇이나 될까?


결과적으로, 녹티스와 그 주변 인물들은 참 대충 만들어진 캐릭터다. 캐릭터를 만들고 설정은 짰는데 그것을 긴밀하게 연결시켜 스토리의 뼈대를 만들어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모든 것을 운명으로, 신탁 그대로 풀어나갔다. 시리즈의 수명을 이어가기 위해선 때론 과감한 시도도 필요한데, 안전한 길을 택했지만 그 안전한 길도 가시밭길로 만들어 버렸다.


2. 만들다 만 게임

시간이 더 있었다면 이런 퀄리티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의견에 무게를 실어주고 싶다. 근거는 첫째, 물의 도시 티시에. 리바이어선에게 계시를 받기 위한 1회용 맵 치고는 맵이 매우 넓었고 선착장 아이콘(오른쪽에 보이는 교회)은 보이는데 갈 방법을 도저히 못 찾았을 정도였다. 원래 이 맵에서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걸로 보인다. 둘째, 아라네아 파티인 버그. 분명 버그인데도 프롬프토가 찍는 사진에서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한다. 같이 차는 타지 않더라도 단순히 버그로 넘어가기엔 캥기는 구석이 많다. 이런 점을 미루어봤을 때 15는 완성도가 매우 낮고 보완해야할 점이 많다. 여기서 제일 보완이 필요한 것은 챕터13에서 밝혀진 많은 사실이다.


* 아덴은 과거 루시스 왕가의 인간이었다

* 프롬프토는 제국의 인간이었다

* 이돌라도 시해화 되었다

* 레이브스는 루나프레나를 오빠로서 걱정하고 있었다


아덴은 최종보스인데도 위압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내내 언급조차 없다가 등장한 기생충도 뜬금없었고, 아덴 자체가 너무 수상하기에 오히려 새로울 것이 없어서 반전도 반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프리트가 최종보스같을 정도였다. 아덴의 과거를 영상으로 만들거나 연출로 돋보이게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성우에게 의지했다.


프롬프토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었기에 뜬금 없었다. 이 장면을 반전으로, 동료와의 관계성에서 중요한 의미로 사용하려면 챕터 13전부터 프롬프토가 자신의 출신에 대해 고민하는 장면이 메인 스토리에서 1%라도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게 전혀 없이 프롬프토의 출생은 [크리스탈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 사용되었기 때문에 1회용으로 쓰이고 공중 분해되는 설정이 되었다.


레이브스는 원래 다른 역할이 있었는데 시간에 쫓기다가 급하게 캐릭터성을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13 버서스 트레일러를 보니, 하얀 로브를 쓰고 녹티스와 전면 대결을 펼쳤던 인물이 레이브스로 추정되는 것도 그렇다. 3번에서 더 자세하게 이야기 하겠지만 원래 이런 캐릭터가 아니었는데, 아무 이유 없이 노선이 변경되었다. 


3. 의미 없었던 미디어 믹스

15는 발매하기 전에 애니메이션, 영화같은 영상 매체를 만들어 홍보했다. 다른 게임이라면 꿈도 못 꿨겠지만 15는 대규모 프로젝트였기에 가능했다. 여기서 영화 <킹스글레이브>는 매우 호평이었고 이 영화로 많은 사람들이 본편을 기다리게 되었다. 하지만 본편 엔딩까지 봤을 때, 영화는 별로 의미가 없었다.


* 레기스와 직접적으로 대립했던 이돌라. 본편에서는 공기화 되었다.

* 영화에서 레이브스는 레기스를 증오하고 힘을 갈구하는 캐릭터에다 여동생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 모습을 보였으나, 본편에선 레기스를 인정하는 모습에 레기스의 검을 죽을 때까지 계속 가지고 다녔고 여동생을 아꼈다.

* 영화에서 글라우카 장군은 닉스와 혈전을 벌이나 마지막에 살아있는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게 틀렸던 건지 본편에선 아예 죽은 걸로 나온다.

* 영화 후반부, 닉스와 역대 왕들이 말을 주고받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런 장면이 본편에서도 있을 줄 알았으나 전혀 나오지 않았다.


영화와 본편이 긴밀하게 연결되는 구석은 루나프레나가 반지를 가지고 탈출하는 장면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연결되지 못한채 버려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미디어믹스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4. 마무리하며

장점이 아예 없는 게임은 아니다. 챕터8까진 장황하지만 탐험할 구석이 많은 오픈월드와 스토리는 게임을 계속 진행할 수 있는 좋은 동기가 되었다. 이것은 야리코미 요소에도 유효하다, 하지만 후반으로 들어갈수록 형편없는 전개는 지금까지 쌓아놓은 장점을 다 없애버릴 정도였다. 너무 아쉬운 게임.



★★☆